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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오비

아나오비 1

by 슛유 2022. 3. 11.

일광이 차단된 검은 하늘 아래 회백색의 분진이 정신 없이 휘날렸다.

 

손바닥에 쌓이는 거친 입자의 가루를 날려 보내며 어디선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음을 나는 기억해냈다. 영하권의 지역에서는 상공에서 응결된 수증기가 얼음 결정의 형태로 바뀌고, 그러한 결정이 수백 개가 모이면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했다. 눈송이라고 하지. 손가락 사이로 녹아드는 눈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던 내게 오비완은 그렇게 설명했다. 당시 내가 아는 세상은 나고 자란 사막 행성의 도시인 모스 에스파와 코러산트의 제다이 사원이 전부였고, 나의 세계는 오비완의 조율에 따라 서서히 확장되어 가던 중이었다. 차갑고 축축하게 달라붙는 얼음 알갱이가 신기하여 손바닥을 펼친 채로 가만히 있자 그는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장갑을 내 두 손에 씌워 주었다. 안감에 짐승의 털이 덧대진 보드라운 가죽 장갑이었다. 육, 칠 년은 족히 더 된 일이다.

 

나는 고글 위에 달라붙은 분진을 쓸어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폭발의 잔열이 갑옷의 강화 플라스틱을 뚫고 들어와 살갗을 미적지근하게 익혀댔다. 옛 기억을 소환한 것치고 내가 접하고 있는 광경은 당시와는 정반대의 성질을 띄고 있었다. 말하자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회색빛의 지옥도였다.

 

“방해 전파 때문에 신호가 먹통이에요.” 마지막 수송기까지 모두 착륙한 것을 확인한 렉스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소매 끝에 달린 군용 콤링크의 비상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몇 번 누르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런 곳에선 지도도 무용지물이고요.”

 

“지도를 수정해야 할 거야.” 나는 지도상 야산이 기록되어 있는 북서쪽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산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콤링크의 사용 주파수를 바꾸고 우리는 작전 지역에 산개하여 수색 작업을 개시했다. 제212 정찰사단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교신을 보낸 지 8시간이 지나가는 참이었다.

 

바닥에 널부러진 새까맣게 타버린 가축 한 마리와 민간인 시체 두 구가 다리를 건너 마을 입구에 들어선 우리를 맞이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팔레미안 무역 항로의 한가운데, 이너 림에 위치한 행성 중 하나인 타납에 위치한 한 시골 마을이었다. 은하계 지리나 경제 수업 시간에 자주 등장하는 이 은하계 최대 규모의 농경 행성은 독자적 매력이었던 생기를 잃은 채로 곳곳에 불길하게 타오르는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농경지는 풀 한 포기 남지 않는 잿더미가 되었고, 농가가 세워졌던 자리에는 흉한 철골 구조물만이 흔적으로 자리했다. 모든 것이 지난 48시간 동안 벌어진 교전의 참혹한 결과였다.

 

지글거리는 열기, 시야를 흐리는 분진, 그리고 갑갑한 헬멧 안을 울리는 나의 숨소리. 그 속에서 나는 이번 수색 및 구조 작업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던 상부와 입장을 함께했던 월프 율라렌이 꺼림직한 얼굴로 내뱉은 한 단어를 떠올렸다. 전멸. 제212 정찰사단의 전멸. 오비완이 이끄는 부대의 전멸.

 

거대한 그림자가 강가를 건너는 중이었던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림자의 근원을 쫓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방에 날리는 먼지와 그을음으로 인해 고글 너머 가시거리는 형편 없이 짧았다. 먹구름 위로 희미한 불빛이 불길하게 점멸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지 않아도 익숙한 엔진음을 통해 수 백 대의 공화국 군용 수송기가 북부로 향하는 중임을 알았다.

 

곧이어 저 멀리 지평선 너머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폭격의 굉음을 무시하며 나는 다시금 내가 밟고 있는 땅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색 작업에 집중해야 했다. 가까스로 본부를 설득해 얻어낸 임무였다. 율라렌의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내야만 했다.

 

맹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평정이 사라진 빈공간을 무서운 기세로 점령했다. 무엇이 되었든 내 앞길을 방해한다면 한치의 주저 없이 벨 준비가 되었다.

 

분노, 후회, 절망, 공포. 전투에 임할 때면 때때로 나는 제다이로서 터부시되는 부정적 감정을 은밀하게 즐기고는 했다. 이것들은 내게 신속한 결단, 강화된 전투력, 전우애라는 소속감 등으로 시기적절하게 형태를 바꿔 다가왔다. 전쟁의 시대는 내게 여러 고통을 안겨줬으나 그에 대한 댓가로 평화의 시대가 주지 못한 단 하나를 내게 허락했다. 그것은 오랜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였다. 나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 속에서 충동을 즐기고, 나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 시험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모든 감정이 내 통제 아래 있기에,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반대 방향으로 남하했던 3분대의 분대장으로부터 제212 정찰사단의 일부를 발견했다는 교신을 받은 것은 우리가 마을의 절반을 가로질러 물탱크 타워를 지나가던 때였다. 전달된 좌표를 따라 도착한 곳은 화마가 빗겨간 한 농장의 마구간이었다.

 

그리고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 낡은 마구간의 한 구석에 오비완이 있었다.

 

“피에 젖은 투구와 번뜩이는 창날이 너를 증명할 지니, 까마귀와 이리가 네 심장을 뜯어 만찬을 벌이고 창백한 네 시체 아래 푸른 이끼가 돋아날 때 별들이 길을 인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네 영혼은 위대한 전사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에 머무르리라.”

 

오비완은 죽어가는 클론 병사를 끌어안고 그의 귀에 만달로리안의 기도문을 속삭이는 중이었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병사의 숨이 끊기고, 오비완이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땅바닥에 눕힌 뒤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나는 그의 등 뒤에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 보았다.

 

“굳이 네가 오지 않아도 되었어.” 이미 내 기척을 한참 전에 알아챘을 오비완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몹시 피로해 보였다. 미간 사이를 문지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대규모의 육군 부대가 북부로 향하는 걸 보았어. 공습이 시작되더군. 넌 거기 있었어야 돼.”

 

오비완의 단호한 목소리는 마치 오늘 아침 함교에서 나와 육군본부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의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처럼 들렸다. 나는 침묵으로 응수했다.

 

숨소리가 헬멧 안을 울렸다. 내가 헬멧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기본적으로 나는 나를 옥죄는 모든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어쩔 땐 신고 있는 양말 조차도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헬멧을 쓰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요동치는 감정을 갈무리하는 것만으로도 내 모든 집중력이 소모되는 판에 표정까지 관리할 자신이 없었다.

 

“부대가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준비된 덫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기습 공격을 당했어. 전력의 팔 할 이상을 잃었고. 부대 배치에 대한 결정은 고작 여섯 시간 전에 이뤄졌고 일반 병사들을 도착 직전까지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 지 조차 몰랐지. 이건…. 이건, 장교들 중 누군가가 정보를 적군에게 넘기고 있다는 거야. 너의 용맹함이 네 자신과 너를 따르는 병사들을 어쩌면 큰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단 말이다.” 오비완의 일방적인 설교가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한 마디를 거들었다가는 두 마디의 반론이 돌아올 것을 알기에 나는 오비완이 만족할 만큼 얘기를 하다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기사로 서임 되어 그에게서 독립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나가 건만 이럴 때면 우리는 또 다시 마스터와 파다완의 관계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가 완전히 동등한 관계로 마주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제발 쓸데없이 무모하게 굴지 마.” 오비완이 내뱉듯이 말했다.

 

클론 병사 둘이 다가와 시체를 들것에 실어 갔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생각이 가지를 치고 돋아난 가지에서 또 가지를 쳤다. 오비완의 마지막 문장은 기폭제나 다름 없었다.

 

“쓸데없는 일에 무모하게 굴지 말라구요?”

 

“그래.”

 

“지금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거에요? 당신을 구하러 온 건 쓸데없는 짓이니 하지 말았어야 했던 행동이고, 그 대신 지금쯤 북부에서 이뤄지고 있는 공중 강습에 참여해야 했다고 말하는 거냐구요. 신나게 기계들을 때려잡으면서 말이죠. 당신이라면 내가 죽어갈 때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비완의 포스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일순간 나는 아주 짧게나마 승리감을 느꼈다.

 

“그런 가정을 하고 싶지는 않다만.” 그렇게 말하는 오비완의 포스는 어느새 다시 고요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온다면 해야 할 일을 하겠지. 행성이 분리주의 연합 측에 넘어가게 되면, 전략적 요충지를 잃는 것뿐만 아니라 수 조의 인민이 식량난으로 고통 받고 많은 이가 굶어 죽게 돼. 네가 가진 능력을 고작 나 하나 구하는 데가 아니라 더 큰 곳에 써야 한다는 말이었어.”

 

“생명을 두고 저울질 할 수 없다고 가르친 건 당신이었어요.” 나는 곧바로 오비완의 말을 맞받아쳤다.

 

“우린 군인이야.” 오비완은 마치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처럼 ‘군인’이란 단어에 강세를 실었다. “이미 죽은 것과 다름 없지. 죽은 이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어리석은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오비완이 문장을 끝냈을 때, 때마침 코디가 양해를 구하듯 헛기침을 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둘은 무언가를 의논하기 위해 자리를 떴고, 나는 제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오비완을 바라보았다.

 

만달로리안의 기도문을 읊던 굽은 등. 그리고 내게서 멀어져가는 등.

 

제다이인 오비완이 만달로리안의 종교를 믿을 리는 만무했다. 다만 그의 기도는 클론 병사가 죽어갈 때, 죽음으로써 그들이 믿는 이상향에 도달할 것이라는 마인드 트릭을 거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클론 병사를 위해 기도할 때면, 흘러나오는 그의 포스에서 연민이 읽히곤 했다.

 

요동치던 감정은 비참함으로 수렴하여 나를 깊은 수렁으로 끌고 내려갔다. 끝이 없는 바닥으로 쳐박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진심으로 나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헬멧의 존재에 감사했다. 일개 클론 병사 만큼의 처지도 되지 못하는 현실이 우스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값싼 동정이라도 좋았다. 믿음 없는 기도, 상대를 속이는 마인드 트릭 같은 것이라도 좋았다. 무조건적 애정 같은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단 한 번이라도 그가 나에게 피상적으로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면, 혹은 그에 상응하는 인정을 보였더라면 나는 천국에 가리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죽음을 자처하는 순교자처럼 그를 위해 내 목숨을 몇 번이고 기쁘게 내어줬으리라. 그렇지 못한 현실에 나는 비참했다.

 

그러나 더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오비완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닌 임무를 선택하겠다는 그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같은 상황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해뒀던 클전~시복 배경의 안옵 이야기 중 일부분. 클론 트루퍼한테 마인드 트릭 쓰는 오비완이 보고 싶다는 욕망이 반영된 글. 짧막하게 써둔 글이 몇 개 더 있는데 나중에 시간되면 이어서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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